달거나 씁쓸하거나
작성일
2018. 6. 16. 22:30
작성자
달콤 씁쓸

긴자 (1)

2018.5.


* CITAN / BERTH COFFEE  HP  지도

모닝 플레이트(900엔)

 친구가 출장을 나가게 되어 부득이 일요일은 혼자 돌아다니게 되었다. 긴자를 중심으로 돌아다닐 거라 이동시간도 크게 안 걸리는데 역시 직장인은 어쩔 수 없는 건지 눈이 빨리 떠졌다. 여기서 도쿄역까지는 10분밖에 걸리지 않고, 가게는 대부분 10시에 열기 때문에 늦잠을 자도 상관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일단 일어났으니 움직인다. 그 전에 뭔갈 먹고 싶은데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다. 굳이 그런 곳을 찾아가기도 귀찮아 게스트하우스에 마련된 모닝 플레이트를 먹기로 한다.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두고 고민했지만 역시 든든한 게 제일이다. 주문하면 모닝 플레이트에 곁들일 빵을 고를 수 있는데, 크루아상과 뺑오쇼콜라 중 선택할 수 있다. 음료도 선택할 수 있지만, 가짓수가 많지 않다. (나는 사과주스를 마셨다) 지하에 내려가서 음식을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예 생각을 못 했다. 다 먹어갈 때쯤 다른 사람들이 내려가는 거 보고 내려가 볼 걸 하는 후회를 했다. 

 가격에만 눈감는다면 모닝 플레이트는 맛있었다. 쫄깃한 크루아상, 오렌지 조금, 새콤하면서 살짝 떫은맛도 있는 드레싱을 끼얹은 샐러드. 미니 프라이팬에는 파슬리와 기타 향신료를 솔솔 뿌린, 그러나 자극적이지는 않았던 감자, 소시지, 계란후라이가 있다. 각각의 양은 적지만 가짓수가 많으니 마음이 푸근하다. 좋다. 이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침구를 정리한 뒤, 소지품을 챙겨 1층 공용스페이스에서 캐리어를 정리한다. 다행히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클리어라떼를 아직 안 마신 채였다. 한 모금 마신다. 찡그린 표정이 절로 나올 정도로 뜨악한 맛이다. 잘못됐다. 첫맛은 커피 사탕을 물에 희석한 맛인데 끝맛은 시다. 거기다가 명색이 물인데 단 음료 특유의 마신 후 입속 찝찝함까지 구현해냈다. 놀랍다. 이토록 단점만 모아서 만든 음료라니. 그렇지만 버리려니 뭔가 아까우니, 일단 가방에 넣었다. 목마를 때 유용하겠지 뭐.

 

* 도쿄역

 오늘은 내가 사고 싶던 것들을 맘껏 사는 게 목적이다. 일단 제일 궁금했던 프레스 버터 샌드를 사기 위해 JR선을 타고 도쿄역으로 온다. 가게가 역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구글 지도로 살펴봤을 때도 그렇지만 실제 걸어보니 개찰구 안 역사가 정말 넓다. 하지만 구글 리뷰에 친절하게도 중앙선 근처, 남쪽 출구 쪽에 가게가 있다고 적혀있어 크게 헤매지 않고 가게를 찾을 수 있었다. 역시나 가게는 아침부터 성업이었다. 그놈의 줄! 이른 시간이라 줄이 짧은 게 천만다행이다. 맞은 편에는 뉴욕 퍼펙트 치즈가 있는데 프레스 버터 샌드에 필적하는 길이의 줄이 있었다. 치사하게 구매 제한까지 있다. 개별포장 된 것과 상자로 된 것을 골고루 샀다.

 마루노우치 출구로 나왔다. 여기 오는 건 두 번째지만 다시 와도 좋다.

 역사가 하나의 관광지다. 

 

* G.Itoya 긴자점  HP  지도

 목표 그 두 번째는 이토야 긴자점에 가는 거다. 최대한 느긋하게 움직였는데도 개장까진 아직 30분이나 시간이 남아 건물도 구경할 겸 미츠코시 백화점 근처까지 천천히 걸어본다. 다들 문이 닫힌 채라 영 재미가 없다. 하릴없이 건물만 보았는데 명품이 독립적인 매장을 가지고 죽 늘어서 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이쯤 해서 돌아가면 매장이 열겠다 싶어 아까 본 기억을 더듬어 길을 걷는다. 곳곳마다 개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보인다. 그러다 10시가 되니 어딘가에서 종이 울린다. 종이라니? 초현실적인 느낌이다. 마침 그때 애플스토어를 지나고 있었는데 10시가 되어 입장하는 손님에게 직원들이 문 양쪽에서 줄지어 박수를 쳐 준다. 정신이 혼미하다. 그러고 보니 애플스토어에서 단말을 사면 매장 내 직원이 전부 축하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나는 절대 저런 박수 세례를 받고 싶지 않다.

 이토야는 1904년에 개업한 유서 깊은 문구점이다. 땅값이 비싸다는 긴자에서 단독으로 12층 건물을 내다니 물건들이 얼마나 비쌀까. 어떤 가격을 봐도 놀라지 않겠다 속으로 다짐하며 가게로 들어간다. 하지만 그런 각오도 허무하게 가게는 평범했다. 가격은 물론 비쌌지만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1층을 적당히 둘러보다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기로 한다. (하지만 상행 에스컬레이터는 있는데 하행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 정확하지는 않다 - 가게 구조상 위로 올라갔다가 엘리베이터로 내려오는 게 낫다)

 카페를 이용할 생각은 없으므로 11층부터 둘러본다. 현대식 수경재배는 미디어를 통해 많이 접했지만 직접 보니 또 느낌이 다르다. 여기서 기른 채소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12층 카페에서 이용된다고 한다.

 개점하고도 30분이 지났지만, 사람들은 1층에만 몰려있는 건지 다른 층은 조용했다. 가게 분위기와 소음의 수준으로만 보자면 마치 고급 매장이다. 여기엔 진열된 물품도 한몫한다. 

 가게에 있는 모든 것이 (당장에 쓸 만한 것이 없어서 사진 않았지만) 정말 정교하고 예뻤다. 하지만 제일 마음에 들었던 곳은 단연 7층의 파인 페이퍼 코너였다. 다양한 종이를 15*15의 1/4 크기로 잘라 색별로, 종이 종류별로 늘어놓아 간편하게 비교하여 살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입이 벌어진다. 진열일 뿐인데도 이미 하나의 예술이었다. 

 가게 구석에는 종이로 만든 꽃도 걸려있다. 반대편엔 키트 같은 것이 참고서와 함께 판매되고 있다.

 그리고 그 키트 중 일부를 체험할 수 있게 해 놓은 공간이 있었다. 참 친절하기도 하지. 체험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나는 당장 꽃을 만들기 시작한다. 꽃잎과 수술/암술이 되는 종이와 양면테이프를 적당량 꺼낸다. 꽃잎을 부드럽게 감은 뒤 양면테이프 한쪽을 뜯어 꽃잎을 붙인다. 이제 말아둔 수술/암술만 붙이면 된다. 그런데 양면테이프 다른 쪽이 벗겨지질 않는다. 불량인가 싶어서 한 장 더 꺼냈다. 또 안 된다. 어느새 다른 사람들이 옆에 와서 꽃을 만들고 있다. 도대체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나 관찰하니 꽃잎 사이의 구멍으로 수술/암술을 끼워 넣는다. 따라 했다. 이때만 머리가 참 안 돌아간다.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그래도 나만의 꽃이 하나 완성되니 기쁘다.

 블로그에 쓰려고 조사하다가 알게 된 건데, 긴자의 이토야는 대로변에 접한 G.Itoya와 G.Itoya에서 한 블록 들어간 곳에 있는 K.Itoya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내가 간 이토야는 진열된 물건도, 분위기도 고급스럽지만 K.Itoya는 흔히 문구점이라면 떠올리는 그런 곳이라고 한다. 어쩐지 다들 비싸다 싶었다. 

 구경할 건 다 했으니 가게를 나오려고 하는데, 곧 있으면 생일인 친구가 생각난다. 뭔가 적당한 생일 카드는 없을까 고르다가 하나 사서 나온다. 마음껏 구경했으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식빵 가게로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