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석굴암
2018.10.
* 내가 모르는 경주
어린 시절의 경주는 수학여행지로 이름 높던 곳이다. (물론 지금도 그 명성은 여전하다) 동시에 수학여행지와 함께 따라다니는 온갖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곳이기도 했다. 불친절하다, 맛있는 음식점이 없다느니 말이다. 많은 시간이 지나 자유여행으로 가 본 경주는 수학여행으로 전혀 다른 곳을 갔는데도 덧씌워진 선입견의 색안경을 거하게 부숴버렸다. 나지막하고, 도보로 여러 곳을 다닐 수 있고, 문화재도 가득한 아름다운 도시. 한동안은 매년 비슷한 시기에 같은 코스만 돌았다. 그래도 질리지 않았다. 그만큼 좋았다.
약발은 오래전에 끝난 뒤였다. 경주, 그래. 또 가긴 해야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마침 때는 가을이었고, 바쁜 시기도 지나 돌아다니기 한창 좋을 때였다. 뉴스에서는 연일 단풍 절정 시기를 읊어대던 때였다. 그래, 경주에 가야겠다. 마지막으로 간지 언제인지도 모를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가자. 전날 급하게 기차를 예매했다. 출발하기 좋은 시간은 이미 매진 표시가 뜬 뒤다. 그러면 나는 아예 이른 시간으로 예매해야겠다. 동대구역에서 6시 42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 불국사역에서 8시 7분에 내린다. 가까운 도시를 여행하는데 이렇게 빨리 움직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외국에 가면 본전을 뽑는다고 아침 일찍 움직이는데 여기서는 안 될 게 뭐가 있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나와서 뭘 먹을까 찾던 중 전부터 계속 먹고 싶었던 토스트가 눈에 들어온다. 대합실에서 승강장으로 이동하는 곳에 가게가 있어 지나치기만 했는데 이번에 드디어 먹는다. 계란야채토스트. 든 건 많이 없지만 사각사각한 야채가 기분 좋다.
기차에서 내리니 제법 쌀쌀하다. 따뜻하게 입고 오길 잘했다. 주중엔 따뜻했는데. 집에 있던 사람이 마음먹고 외출하려고 하면 날씨가 항상 좋지 않더라.
역은 아담하다. 건물은 작지만, 현수막을 보니 올해로 무려 100년의 역사를 지닌 철도 문화재 역이라고 한다.
불국사는 지도상으로는 불국사역에서 도보로 30분 정도라 되어 있었다. 30분이면 평소에 집에서 근처 공원에 가는 것처럼 생각하고 걸어가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자유여행으로 가는 불국사는 처음이니 일단 버스부터 타고 가 보자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멀었다. 도대체 가깝지도 않은데 불국사역이란 이름은 왜 붙었을까. 어디든 간에 건물과 전혀 가깝지 않은데도 건물 이름을 붙인 역은 존재하는 것 같다.
불국사의 입장료는 5,000원이다. 블로그로 찾아보니 카드가 안 된다는 말도 있어서 어머니께서 현금을 준비하셨다. 그런데 그만 현금을 내며 평소 습관대로 카드도 내버렸다. 받은 건 2명분의 입장권과 카드만이라, 한 사람당 10,000원을 낸 셈이 되었다. 여기가 어디 변방의 이름 없는 관광지도 아니고 명색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쯤이나 되는 위치의 문화재인데, 계산도 하나 제대로 못 한다. 바로 알아챘으면 돈을 돌려받았을 텐데, 집에 온 뒤에 가계부를 정리하면서 알게 되었다. 분명 돈을 받는 계산원은 알았을 텐데 말이다. 눈 뜨고 코를 베인 것 같아 짜증 났다. 사과는 받았지만, CCTV가 없기 때문에 돈을 받진 못했다. 괜히 블로그를 보고 안 쓰던 현금을 챙기기보단 평소대로 카드로 결제하는 게 답이다.
마침 가을철이라 불국사 곳곳에 국화가 놓여있다. 두 색뿐이지만 채 단풍이 들지 않은 불국사 경내를 밝혀주기엔 제격이다. 머리에서만 그리던 연화교/칠보교, 청운교/백운교를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롭다. 신라 시대의 계단을 볼 수 있다는 게 새삼 기적 같다. 사진을 찍으려 보니 이른 아침이라 햇빛이 제대로 나지 않았지만, 그 덕에 사람도 많이 없으니 쌤쌤이었다. 그런데 사진을 다 찍고 극락전으로 들어가려 하니 절 관계자도 아닌 것 같은 중년 여성분이 관계자의 안내를 받으며 연화교-칠보보에 들어가 국화 사진을 찍고 있다. 분명 계단 위아래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판이 있다. 도대체 문화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극락전은 계절 탓인지 이름과는 달리 다소 휑하다. 앞에 있는 석등인 장명등 앞에는 시선을 방해하는 '극락전 복돼지상'이 있다. 최근에 만들어진 것 같은데 도대체 왜 이 위치에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청운교-백운교와 쌍으로 유명한 다보탑과 석가탑. 석가탑은 사람이 없어 휑하다.
요즘 연등은 석가탄신일만이 아니라 연중 볼 수 있다.
재미있던 장소. 당시 풍경이 절로 상상된다. 하지만 역사적 흔적이 울타리 하나 없이 팻말 하나로 아무렇게나 방치되어있어 씁쓸하기도 하다. 석굴암에서도 석재물이 방치 비슷하게 되어 있었다.
불국사 초입에서 보았던 가게도 그렇고 안내소도 나무를 사용해서 주변 풍경과 어우러지니 좋았다. 그렇지만 기념품 매장은 어디의 구멍가게도 아니고 물품 진열이 중구난방인데다 불교와는 아무 관계 없는 상품도 있다. 살 만한 게 없었다. 내려가려고 보니 샛길 쪽에 뭔가 있다. 옛날 여행지에서 자주 보던 그런 노점상이 여럿 있다. 그중 어떤 할아버지께서 호떡을 사라고 하신다. 가만 보니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를 음식이다. 돈을 받고 판다니 양심이 없다.
불국사를 볼 만큼 본 뒤 석굴암에 가려고 버스정류장에 오니 시간표가 있다. 조금만 서둘러서 버스를 탔더라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을 텐데 싶어 아쉽다. 백 보 양보해 기다리는 건 상관이 없는데 날씨가 추우니 조금 힘들다. 심심하니 정류장 뒤편에 있는 식당가를 둘러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면도로로 들어서니 어느 가게에서 나오셨는지 아주머니께서 대뜸 여기서 밥 먹고 가라고 호객행위를 하신다. 부담스러워서 다시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다시 하염없는 기다림이 시작됐다. 그래도 자유여행으로 다니는 게 우리만은 아닌지라 사람들이 정류장에 삼삼오오 모여들어 조금 덜 외롭다.
기다리다 보니 택시가 정류장을 훑듯 느리게 지나간다. 그건 양반이다. 어떤 택시는 버스가 잘 안 온다고, 이거 타는 게 낫다면서 대놓고 호객행위를 한다. 정류장에는 택시 이용 시 만원이라 적혀있다. 모든 택시 공통인 듯하다. 하지만 이땐 이미 기다린 지 한참인지라 오기로라도 택시를 타지 않았다.
40분을 기다려서 버스를 타고, 또 한 시간 가까이 달려 석굴암에 도착했다. 불국사와 마찬가지로 입장료는 5,000원이다. 포장되어 있지 않은 길을 걸어 석굴암으로 간다. 짧진 않지만 멀지도 않은 거리. 적당히 걷기에 좋은 길이지만 역시 날씨가 추워 운치는 뒷전이다. 막상 도착해 눈으로 본 석굴암도 유리에 가로막혀 먼 곳에서 지켜만 볼 수 있다. 외관도 공사 자재에 막혀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입장료는 많이 줬지만 뭔가 허전하다. 그래도 바깥으로 나오는 길에 다람쥐를 볼 수 있어 즐거웠다.
석굴암에 도착할 땐 버스 시간에 맞춘다고 입구로 허겁지겁 들어가 경황이 없었지만, 기다리면서 둘러보니 여긴 불국사보다 입구가 더 휑하다. 만리장성은 산에 있었지마는 그래도 이것저것 먹을거리라도 있었지, 석굴암은 아예 주자장이다. 번듯한 가게라곤 오뎅가게였는데, 먹거리가 얼만가 싶어 기웃거리니 주인으로 보이는 남성분이 안 살 거면 뒤에 사람 있으니 비키라고 성낸 소리를 낸다. 물론 사람은 많지 않았고 우리 뒤에도 사람은 없었다. 안 살 것 같으니 파리 쫓듯 우리를 내쫓은 것이다. 참고로 핫도그는 3,000원이다. 심성도 좋지 않을뿐더러 음식 가격도 어이가 없다. 인도에는 어디서 오셨는지도 모를 할머니께서 좌판을 펼쳐놓고 나물을 팔고 계신다.
불국사와 석굴암 모두 세계적인 문화재이다. 그래서 입장료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둘러보니 문화재만 대단했지 주변 환경은 황당할 정도로 옛날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경주의 악명은 다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구나 싶었다. 단체관광객이 많았는데 그것만 믿고 관리를 소홀히 하나? 경주역-보문 일대와는 확연히 다르다. 입장료 계산 실수, 이해가 안 되는 문화재 관리, 호객 행위, 비위생적인 음식, 인접한 문화재를 이어주는 교통수단이 유일할 뿐만 아니라 한 시간에 한 대라는 극악의 배차 간격이라는 것. 일부 사례라기엔 여기서 겪은 나쁜 경험이 너무 많다. 앞으로 경주에 오더라도 이 근방에는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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