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연고 (1)
2022.2.
일본에서 생활하고 나서 처음으로 도쿄를 벗어났다. 급하게 나고야로 가는 신칸센을 잡으려다 보니 가격이 너무 부담되어 제일 낮은 등급인 코다마를 탔다. 제일 빠른 신칸센 등급인 노조미보다 1시간이나 더 걸렸지만, 그래봤자 목적지가 나고야니 버틸 만하다. 비행기로는 종종 보았지만, 기차로는 처음이었던 후지산은 차창으로 보는데도 크다. 직접 보면 압도적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도 산행은 영 내키지 않는다.
새우튀김을 넣은 주먹밥인 텐무스를 먹고 일정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가게가 안 보인다. 이상하다 싶어 주소를 보니 긴테츠 철도 개찰구 내라고 하여 깔끔하게 포기하고(알고 보니 개찰구 바깥이었다), 카페 콘파루로 갔다. 까짓거 식사를 하지 말까도 싶었지만, 전날에는 조금만 식사한 데다, 아침도 오트밀로 간단하게 끝내다 보니 당장 어떻게 될 것만 같아서 가게에 들어갔다.
가게는 실내를 반으로 나눠 가림막을 설치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나뉜 공간 안에 있는 테이블 사이에는 따로 가림막이 없다. 가림막은 그저 방역 조치를 했다는 생색내기에 불과했다.
오전은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많았으며 음악 또한 옛날 재즈와 비슷한 노래가 흐른다. 그렇지만 여유 넘치는 노래와 달리 식사는 허기 때문에 그저 음식을 때려 넣다시피 하다 보니 음식이 어떠했는지 아무런 인상이 없다. 멘치가스(다진 고기 튀김), 양상추, 소스, 치즈가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케첩 기반의 소스가 강했다는 것밖에 기억이 안 난다.
조금 살만해진 뒤 도요타시 미술관으로 갔다. 여행하다 보면 식사를 제때 못 챙기는데, 그렇게 버티다 버티다 식사하면 그 뒤에는 꼭 맛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날도 어김없이 그랬다. 미술관으로 가기 위해 도요타역에 내리니 크레프와 붕어빵이 있다. 그렇지만 간식으로 식사를 하게 되면 점심이나 저녁은 잘 챙겨 먹지 못할 것 같아서 인내로 지나쳤다.
도요타시 미술관은 인스타그램으로 알게 된 장소라 걱정도 되었지만, 도쿄국립박물관 호류지관을 설계한 타니구치 요시오라 안 갈 수가 없었다. 미술관은 역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데, 길도 잘 닦여 있지 않을뿐더러, 경사가 상당해서 겨울인데도 조금 벅찼다. 여름엔 도보로 못 갈 곳이다.
등산 아닌 등산을 하다 보니 산책로라는 이름의 샛길이 나온다. 더 앞으로는 정문으로 통하는 길이 보였지만 산책로가 더 궁금해 풀숲을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마치 자로 잰 듯 배치된 나무가 즐비한 정원이 나온다. 수종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가지는 많은데 겨울이라 앙상하니, 어째 불쌍함만 부각된다. 해당 정원은 미술관을 기준으로는 3층에 해당하며, 실내에서도 볼 수 있도록 돌출된 공간이 존재한다. (사진 중앙을 자세히 보면 해당 공간이 보인다)
규칙적인 걸 넘어 조금은 서늘한 정원을 나오면 곡선을 두른 커다란 수변 공간이 중심을 차지한다. 좁은 공간에서 넓은 공간으로, 흙에서 물로 넘어가는 극적인 흐름이 신선한 즐거움을 준다. 정작 미술관 내부는 아직인데, 아주 마음에 쏙 들어 같은 장소를 돌고 또 돌았다.
정원도 물론 건재하지만, 수변공간의 주변부로 밀려난다. 예의 그 나무는 여전하며 넓어진 공간에 힘입어 조각도 등장한다.
수변 공간 구석에 있던 분수는 조금 특이했는데, 목욕탕에서 보는 것처럼 물에 흔적만 남기는 방식이다.
분수 옆에는 정문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정문에도 같은 모양의 분수가 있다. 다분히 의도된 구성이다.
멀리 돌아왔지만, 드디어 미술관 정문으로 들어왔다. 오른쪽에 보이는 분수 너머로도 정원이 있는데, 잔디를 커다란 바둑판 모양으로 규칙적으로 깔아놨다.
점심은 미술관 내 식당 르 뮤제에서 했다. 뮤제 런치(1600엔)를 주문하고, 메인 요리로는 돼지 볼살 찜을 골랐다. 돼지고기는 푹 삶겨져 굳이 칼을 들 필요는 없었다. 옆의 통유리를 통해서는 수변공간과 설치작품을 볼 수 있다.
미술관을 기준으로 2층 바깥에는 외부는 유리, 내부는 빨강, 노랑, 파랑으로 도색된 사각기둥의 조각들로 가득하다. 문처럼 보이는 조각들은 사각기둥의 네 면을 문처럼 잘라내 일정 거리 떼어 놓은 것이다. 사각기둥과 문을 잘라낸 조각들이 한 묶음으로, 고작해야 세 묶음이지만 인접하여 전체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파악하는 데 깨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안에서 보는 세계와 바깥에서 보는 세계가 달라 탐색하는 과정마저도 즐겁다. 저 멀리 걸어오는 사람은 거울을 통해 여러 곳에 복제되는데, 어디에도 있는 존재면서도, 어디에도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1층과 2층에 있는 분수를 연상케 한다.
설치작품 맞은편에는 동자원(童子苑)이라는 다실이 있다. '동자(童子)'라는 명칭은 도요타시 미술관 부지가 과거 코로모(挙母)번(藩)의 거처였던 성이 있던 곳이었는데, 그 일대를 동자산(童子山)이라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다실 주변으로는 작은 뜰이 있지만, 좌석이 ㄱ자형의 벤치라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기엔 적합하지 않다. 가격은 말차와 화과자를 합해 400엔이다. 말차는 두세 모금만 마시면 끝이라 아쉽게 느껴지지만, 가격을 생각하면 불만을 말하려야 말할 수가 없다.
다실에서 미술관으로 나가는 길도 미술관 주변과 마찬가지로 물이 있다. 길 양쪽으로 물과 흙(잔디)이 교차로 배치된 모습은 흡사 농촌의 이랑과 고랑이다. 길 끝에는 양옆으로 나무가 있는데, 수양벚나무인지 버드나무인지는 모르겠지만 봄철에 훨씬 아름다울 듯하다.
그런데 바깥에서 너무 신나게 돌아다닌 탓인지, 정작 전시회에는 생각보다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부는 궁금해 상설전 티켓만 끊어서 둘러보았는데, 조언해 준 접수원 말대로 규모가 너무나 작았다. 당시 기획전이 작가를 초빙해 열리는 건 줄만 알았는데, 기존 소장품에 일부 초빙 작품을 섞은 거라 상대적으로 상설전이 초라해진 듯하다.
별관은 옻 공예가 타카하시 세츠로 전용 공간이다. 내부 공간 사이에는 반 층 정도의 차이를 있어 아래에서 위로 돌아오는 형식의 동선이 만들어진다. 서늘한 정원도 여기서 감상할 수 있다.
숙소로 가기 위해 나고야역 사쿠라도오리(桜通;벚꽃길) 방면 출구로 나왔다. 한 쌍의 원기둥형 건물 'JR 센트럴 타워즈'와 건물 앞에 있는 나선형의 조형물 '비상'은 밤에 봐도 세련됐다.
저녁은 화덕피자 가게 '솔로 피자 나폴리타나'에서 포장해왔다. 화덕피자는 항상 마르게리타만 먹는데, 이날은 조금 욕심을 내서 루꼴라와 파르마 프로슈토가 들어간 비앙카 네베(1568엔)를 주문했다. 일단 짰다. 그리고 도우는 팬피자만큼 두꺼운 데다 질겼다. 지하도의 크레프나 타코야키, 에클레어 모양의 커스터드를 다 이기고 왔는데 허탈하다.
이대로 하루를 마치기엔 아쉽다. 저녁을 먹고는 사카에로 갔다. 불시착한 우주선 같은 상업시설 오아시스21은 타원형인 것이 세부적인 것은 다르지만 달성군의 디아크를 연상시킨다.
옥상으로 올라가면 중부 전력 미라이 타워가 보인다. 중간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물이 찰랑찰랑 흐르는데 내륙사람이라 그런지 겨울날의 물마저도 이유 없이 좋다.
2월이라 겨울은 끝물이었지만 여전히 밤의 겨울바람은 차고 또 강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름답게 만들어준 것이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노래였다. 옥상에서 한층 아래로 내려가 보니 뻥 뚫린 중간으로 스케이트장이 보인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노래였다. 선곡은 연말 분위기의 것들로 이뤄져, 이유 없이 감성을 자극한다. 여행 직전 개인적으로 상처받은 일이 있어서 그런지, 상당한 위안이 되었다.
지상으로 내려와서 오아시스21과 중부 전력 미라이 타워가 속한, 남북으로 길게 난 히사야오도리(久屋大通;히사야 큰길) 공원을 걸었다. 넓게 펼쳐진 길 양편으로 컨테이너 하우스 비슷한 가게들이 높아도 2층 정도로 늘어서 있어, 대도시에 있는 공원이지만 탁 트이면서도 나지막한 느낌을 준다. 4곳으로 이뤄져 있을 정도로 공원은 크지만, 곳곳에 공사를 하고 있어 미관을 해치는 게 아쉽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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